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단 편집) === 태조탄의 참패 === 고려의 내부사정이 [[영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고려군은 거란군이 [[안주]]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정숙첨의 후임으로 중군 원수에 임명된 정방보는 5군을 이끌고 태조탄([[평북]] [[박천]])에 이르렀다. 이때 비가 내리자, 고려군은 거기서 진을 치고 비가 그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데 고려의 장군들은 ~~군기가 빠져~~ "거란군이 이 날씨에 쳐들어올 리 없고 군사들이 오랜 행군으로 몹시 지쳤으니 쉬게 하는 차원에서 술이나 마시자."며 술자리를 벌여 즐겼고 방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흰말을 타고 진중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깃발을 흔들자, 거란군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갑자기 5군을 에워쌌다. 거란군은 전군을 먼저 격파한 후 중군으로 달려들어 불을 놓아 보루를 불살랐다. 여러 군은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오직 김취려가 이끄는 좌군 만이 버텼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5군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장군 이의유, 백수정과 장군 이희주가 전사했고 김취려는 중상을 입었으며 전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정도였고 치중, 군량, 무기 등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정방보, 조충, 김취려 등은 달아나 개경으로 돌아왔고 도망치는 군사가 길을 메웠는데, 거란군이 개경 선의문까지 쫓아가서 황교를 불사른 후 퇴각하니 개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사대]]는 이 어처구니없는 참패를 초래한 정방보, 조충을 탄핵했고 고종은 결국 정방보, 조충을 파직했다. 이후 거란군은 황해도를 휩쓸고 개경으로 진군했고 최충헌은 개경 일대에 [[계엄령|계엄]]을 선포하고 모든 관리들을 성 밖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그러나 최충헌 본인은 또다시 자기 집에서 꼼짝 않고 수천 사병들의 호위를 받아 지내는 졸렬한 행태를 선보였다.(...) 3월 12일, 거란군이 [[임진강]]에 이르렀다. 이에 최충헌은 신선주 등 장군 5명에게 군대를 맡겨 저지하게 했지만, 그들은 19일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이후 거란군은 개경을 위협했지만 도성 안으로 침공하지는 못하고 개경의 성밖 마을들을 휩쓸고 다녔다. 기록에 따르면, "[[오랑캐]]가 나라 창고를 점거해 털어먹고는 저장해놓은 것들을 불사르고 [[여자]]를 [[능욕|욕보이고]] 찢어 죽여, 길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으며 사찰은 열에 아홉이 불타 버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